요즘 미국을 보고 있으면, 자꾸 한 장면이 겹쳐 떠오른다. 희토류에서, 이란에서, 호르무즈에서, 미국은 분명 세계 최강의 군대와 경제를 쥐고도 번번이 누군가의 손바닥 위에서 노는 것처럼 보인다. 그 손바닥의 주인은 베이징이다. 나는 이게 단순한 외교 실책이나 운의 문제가 아니라고 본다. 더 근본적인 데 병이 있다. 미국은 지금, 싸움의 기본을 잊었다. 그래서 나는 ‘미국 손자병법’ 다시 읽기를 오늘의 화두로 꺼낸다.
그래서 오늘은 좀 도발적인 제안을 하나 하려 한다. 미국은 손자병법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손자를 넘어서야 한다. 모순처럼 들리겠지만 끝까지 읽으면 무슨 말인지 알게 될 것이다. (앞서 중국·이란의 관리된 공조를 다룬 글의 연장선이다.) 이건 학술적 분석이 아니라, 군에서 작전과 정보를 다뤄본 한 사람이 지금의 미국을 보며 느끼는 답답함과 제언이다.
지피지기, 그런데 미국은 ‘지피’부터 틀렸다
손자병법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구절이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知彼知己 百戰不殆).” 너무 유명해서 격언처럼 닳아버렸지만, 나는 이 문장이 지금의 미국에게 가장 아픈 진단서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미국은 ‘지피(知彼)’, 즉 적을 아는 일에서부터 이미 틀어졌기 때문이다.
적을 안다는 건 무엇인가. 그건 적이 어떤 무기를 몇 개 가졌는지를 세는 게 아니다. 적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무엇을 노리며, 어떤 논리로 세상을 보는지를 그들의 머릿속에 들어가 이해하는 일이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간 미국이 중국을 본 방식을 떠올려 보라. 한때는 “교역하면 민주화될 것”이라 믿었고, 한때는 “곧 무너질 것”이라 깔봤다. 자기가 보고 싶은 중국을 봤지, 있는 그대로의 중국을 보지 않았다. 적을 알려는 시도 자체가 자기 희망과 정치적 입맛에 오염돼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백 번을 싸우기도 전에 판단이 위태로웠다.
정보기관의 병 — 정치를 위한 정보
여기서 나는 한 발 더 들어가고 싶다. 적을 제대로 알려면 정보가 정확해야 한다. 정보의 생명은 진실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미국의 정보 공동체 — 그 상징인 CIA를 포함해 — 는 어느 순간부터 진실을 캐는 기관이 아니라 권력의 입맛에 맞는 답을 만들어내는 기관처럼 비치기 시작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판단이고 비판이지만, 근거 없는 의심은 아니다. 이라크 대량살상무기처럼, 정치적 결론을 정해놓고 정보를 거기에 끼워 맞춘 역사가 실재하기 때문이다.
정보가 정치의 시녀가 되는 순간, 지피(知彼)는 불가능해진다. 윗선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올리는 조직은, 적을 아는 게 아니라 적을 자기들 편한 대로 그려낸다. 나는 미국의 정보기관이 지금 해야 할 일은 화려한 작전이 아니라고 본다. 정치를 위한 잘못된 정보질을 멈추고, 불편하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올리는 것 — 미국을 안에서부터 바로잡는 일, 그게 먼저다. 적을 알기 전에, 자기 눈부터 맑게 닦아야 한다.
군에서 정보판단을 하며 뼈저리게 배운 게 있다. 지휘관이 듣고 싶어 하는 보고는 달콤하지만, 그 달콤함이 부대를 죽인다. 가장 충성스러운 정보장교는 가장 불편한 진실을 가장 먼저 올리는 사람이다. 지금 미국에 필요한 건 바로 그런 불편함이다.
미국 손자병법, 그 한계 — 대륙의 병법으로 해양 패권을 논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다. 나는 미국 손자병법, 즉 미국이 이 병법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지만, 동시에 손자병법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본다. 왜인가. 손자병법은 본질적으로 같은 대륙 안에서, 비슷한 문명과 비슷한 군대끼리 벌이는 싸움을 분석한 병법이다. 춘추전국시대, 중원이라는 한정된 무대에서 제후국들이 땅과 사람을 놓고 다투던 전쟁 — 그 경험에서 나온 지혜다. 적과 나의 언어가 같고, 지형이 연속되고, 승패의 셈법이 공유되던 세계의 병법인 것이다.
그러나 미국이 마주한 무대는 다르다. 미국의 패권은 대륙이 아니라 바다 위에, 그것도 전 지구적 규모로 펼쳐져 있다. 문명과 언어와 가치가 전혀 다른 상대를, 수만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경제·기술·정보·여론이 한데 얽힌 다차원 전장에서 상대해야 한다. 손자가 상상한 적은 강 건너 제후였지만, 미국이 상대하는 적은 자국 시장에 스며든 공급망이고, 자국 여론을 흔드는 정보전이고, 자국 대학에 들어온 기술 경쟁자다. 같은 대륙의 병법으로 이 다층 전장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지정학·민심·정보의 삼위일체
그렇다면 손자를 넘어선 분석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나는 세 가지가 하나로 묶여야 한다고 본다. 첫째는 지정학이다. 해협 하나, 광물 하나, 항로 하나가 패권의 급소가 되는 시대다. 호르무즈가 막히면 유가가 흔들리고, 희토류가 막히면 무기가 멈춘다. 지도를 펴고 어디가 우리의 동맥이고 어디가 적의 손아귀인지를 냉정하게 읽어야 한다.
둘째는 민심이다. 손자도 ‘도(道)’, 즉 백성과 윗사람이 한마음이 되는 것을 전쟁의 첫 번째 조건으로 꼽았다. 아무리 강한 군대도 내부가 갈라지면 무너진다. 지금 미국의 가장 큰 취약점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안에서 갈라진 민심일지 모른다. 셋째는 정보다. 앞서 말한 대로,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정직한 정보. 이 세 가지 — 지정학·민심·정보 — 가 따로 놀지 않고 하나의 종합판단으로 묶일 때, 비로소 손자를 넘어서는 전략이 나온다.
역사의 교훈 — 패권은 밖에서 먼저 무너지지 않는다
잠깐 역사를 펴 보자. 패권을 잃은 제국들의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대개 외부의 적에게 정복당하기 전에, 안에서 먼저 곪았다. 로마는 게르만족의 칼에 쓰러졌다고들 하지만, 그 칼이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이미 로마 내부가 부패·재정 파탄·시민정신의 붕괴로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껍데기가 단단했다면 칼은 튕겨 나갔을 것이다.
대영제국도 마찬가지다. 역사가 폴 케네디가 『강대국의 흥망』에서 짚은 ‘제국적 과잉팽창(imperial overstretch)’이라는 개념이 있다. 제국이 자기 경제력이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 군사·외교 부담을 떠안으면, 그 무게에 스스로 짓눌려 내려앉는다는 것이다. 소련의 붕괴도 미국이 군사적으로 이긴 결과라기보다, 내부 경제와 체제가 스스로 무너진 결과에 가까웠다. 외부의 적은 마지막 한 방을 날렸을 뿐, 진짜 사인(死因)은 늘 안에 있었다.
지금의 미국을 이 거울에 비춰보면 어떤가. 끝없는 해외 개입으로 힘을 소진하고, 제조 기반은 비고, 사회는 둘로 쪼개졌다. 나는 이 장면이 과잉팽창의 전형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미국이 두려워해야 할 대상은 중국의 미사일이 아니라, 자기 안의 공동(空洞)이다. 적을 막는 성벽보다, 무너지는 기둥을 먼저 봐야 한다.

진짜 전장은 안에 있다 — 내부의 부흥
그리고 여기서 내가 가장 강조하고 싶은 결론에 이른다. 미국이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길은, 역설적이게도 중국을 향한 외부 공격에 있지 않다. 미국 내부의 부흥에 있다. 적을 이기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적이 흔들 수 없을 만큼 내가 단단해지는 것이다. 손자가 말한 “먼저 이겨놓고 싸운다(先勝而後求戰)”는 게 바로 이 뜻이다. 전장에서 이기는 게 아니라, 싸우기 전에 이미 이겨 있는 상태를 만드는 것.
구체적으로는 끊긴 제조 기반을 다시 세우고, 남에게 내준 공급망을 되찾고, 갈라진 사회를 다시 꿰매는 일이다. 희토류를 자기 손으로 캐고 정제하는 것, 반도체를 자기 땅에서 만드는 것, 동맹을 돈이 아니라 신뢰로 묶는 것 — 이 모든 게 바깥의 적을 때리는 일보다 먼저다. 집 안의 기둥이 썩었는데 밖에서 칼을 휘둘러봐야 제풀에 쓰러진다. 미국이 패권을 도둑맞고 있다면, 그 도둑은 베이징이기 이전에 미국 자신의 나태와 분열이다.
보이지 않는 전장 — 인지전과 여론
현대 패권 경쟁의 가장 무서운 전장은 영토가 아니라 사람들의 머릿속이다. 이른바 인지전(認知戰)이다. 손자는 이미 2500년 전에 최고의 승리를 이렇게 정의했다.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것이 최선(不戰而屈人之兵).” 오늘날 이 문장은 미사일이 아니라 여론·서사·플랫폼을 통해 구현된다. 상대 사회의 분열을 키우고, 신뢰를 갉아먹고,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것 — 그게 가장 값싸고 효과적인 정복이다.
미국 사회가 둘로 갈라진 것을 전부 외부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분열의 씨앗은 안에 있었다. 그러나 적대 세력의 정보전이 그 균열에 쐐기를 박고 벌리는 데 한몫한다는 것도 분명한 현실이다. 문제는, 이 보이지 않는 전장은 항공모함으로도 핵무기로도 막을 수 없다는 점이다. 여기서 미국을 지키는 유일한 방패는 군사력이 아니라, 건강한 시민사회와 신뢰받는 정보 생태계다. 안이 단단하면 어떤 서사 공격도 먹히지 않는다. 결국 또 내부의 문제로 돌아온다.

중국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면
그럼 당장 무엇을 해야 하나. 나는 세 갈래로 정리한다. 첫째, 미끼를 물지 않는 것이다. 중국은 미국을 중동 같은 소모전에 묶어두고 진짜 무대인 인도·태평양에서 힘을 빼려 한다. 어디가 본질이고 어디가 미끼인지를 구분하는 눈, 그게 손자가 말한 ‘적을 아는’ 첫걸음이다. 둘째, 급소를 자기 손에 되찾는 것이다. 희토류·반도체·핵심 광물처럼 끊기면 치명적인 동맥을 남의 손에 맡겨둔 채로는 어떤 전략도 사상누각이다.
셋째, 정직한 자기인식이다. 미국은 오랫동안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상대를 과소평가했다. 그 반대도 위험하다. 있는 그대로의 나와 있는 그대로의 적을 보는 것 — 결국 모든 게 여기로 돌아온다. 지피지기는 멋진 격언이 아니라, 매일 자기 눈의 들보를 빼내는 고통스러운 훈련이다. 그 훈련을 미국이 다시 시작할 수 있느냐, 거기에 패권의 향방이 달려 있다고 나는 본다.
미국 손자병법, 내 결론 — 다시 읽되 넘어서라
정리하자. 미국 손자병법 다시 읽기 — 미국은 이 병법을 처음부터 다시 펴야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안다’는 가장 기본으로 돌아가, 정치에 오염된 눈을 닦고, 희망이 아니라 사실로 적과 자신을 봐야 한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안 된다. 손자의 병법은 한 대륙의 지혜였고, 미국의 패권은 지구 전체의 게임이다. 지정학과 민심과 정보를 하나로 묶는, 손자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 종합 전략 — 그리고 무엇보다 안에서부터 다시 일어서는 내부의 부흥. 이 둘이 만날 때에야 미국은 빼앗긴 패권을 되찾을 기회를 잡는다.
한국에 사는 나에게 이건 남의 나라 훈수가 아니다. 미국이 흔들리면 그 그늘 아래 선 우리도 흔들린다. 강한 미국이 늘 옳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패권이 공백이 되거나, 더 권위주의적인 손으로 넘어가는 세상은 우리에게 결코 유리하지 않다. 그래서 나는 미국이 손자를 다시 펴 들기를, 그리고 그 책을 덮은 뒤 자기 집을 먼저 고치기를 바란다. 적을 아는 일은 거기서부터 시작된다.
자주 묻는 질문 (FAQ)
적을 아는 것 자체가 틀렸다는 뜻이 아니라, 적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게 문제라는 의미입니다. 미국은 오랫동안 자기가 보고 싶은 중국을 봤지, 있는 그대로의 중국을 보지 못했습니다. 정보가 정치적 희망에 오염되면 지피(知彼) 자체가 불가능해진다는 게 이 글의 핵심입니다.
손자병법은 춘추전국시대, 같은 대륙·같은 문명권 안의 전쟁을 분석한 병법입니다. 반면 미국의 패권은 전 지구적 규모에서 경제·기술·정보·여론이 얽힌 다차원 전장입니다. 손자의 지혜는 여전히 유효하지만, 해양 기반의 글로벌 패권을 다 설명하기엔 한 대륙의 병법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외부 공격이 아니라 내부의 부흥입니다. 끊긴 제조 기반 재건, 희토류·반도체 등 핵심 공급망 회복, 갈라진 사회의 통합이 먼저입니다. 적이 흔들 수 없을 만큼 내부가 단단해지는 것 — 손자가 말한 ‘먼저 이겨놓고 싸운다’가 그 핵심입니다.
강한 미국이 늘 옳다는 주장은 아닙니다. 다만 패권의 공백이나 더 권위주의적인 세력으로의 이동은 한국 같은 나라에 유리하지 않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미국의 자기 성찰과 내부 복원을 촉구하는 한 사람의 전략적 견해로 읽어주시면 됩니다.